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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04 10:27 조회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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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인이 난곡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교구 소속 사제들의 인사는 교구장의 전권이니 그가 난곡동 성당 주임신부로 발령 난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뜻이었다. 강우일은 1985년 8월 15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난곡동 성당 3대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1974년 사제가 된 이후 명동 성당과 중림동 성당의 보좌 신부 생활을 짧게 한 것을 제외하면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비서, 서울대교구 교육국장, 홍보국장 등으로 일했다. 난곡은 그의 사제로서 첫 본당이었다.

난곡은 서울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당시 난곡에 있는 초등학교는 특수지 학교로 분류됐다. 특수지 학교는 근무 여건이 열악한 곳에 있는 학교를 말하는데 교사들은 이런 학교에서 근무하면 가점을 받아 다음 인사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주로 산간 오지, 섬에 있는 학교나 분교가 해당되었는데 난곡에 있는 학교는 이 특수지 학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로 분류되었다. 서울 시내에 있지만 난곡은, 우리 사회 빈곤의 오지였다. 2001년 4월 중앙일보 <난곡 리포트>는 당시 난곡을 이렇게 묘사한다.

"산꼭대기의 파란색 공동화장실. 소방차가 올라갈 수 없는 평균 경사 35도의 골목길. 주로 소주·라면만 팔리는 동네 가게. 옛 삼성전자 로고가 남아 있는 1970년대식 거리 간판. 아직도 두 집에 한 집 꼴로 연탄을 쓰는 곳"


01년도 당시의 서울 신림동 난곡 지역 (사진=연합뉴스)

강우일이 난곡에 간 것은 그때로부터도 16년 전이었으니 당시 난곡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빈곤의 현장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모순이 가난이라는 형태로 난곡에 모여 있었다. 난곡은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악다구니를 치는 사람들로 늘 시끄러웠고 매일 곡 소리가 났고 어디선가 싸움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피를 흘렸고 누군가는 핏대를 올렸고 누군가는 쓸쓸하게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세상을 등졌다. 난곡을 관할하는 당시 서울 남부 경찰서의 사건 처리건수는 서울 시내에서 언제나 일등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나눔과 유대와 인정이 있었지만, 펄펄 끓는 삶의 현장이었기에 한 편의 지옥도 같은 풍경이 수시로 펼쳐졌다. 그런 난곡 생활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거기 신자들과 함께 기쁘게 동네를 다녔습니다. 힘들다고 느낀 적 없습니다."


강우일 주교와의 인터뷰는 6월 30일 제주교구장 집무실에서 있었다. 그의 글만큼이나 말에도 거의 수식어가 없었다.

조금은 힘들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으려는데 샤를르 드 푸코 신부 이야기를 꺼냈다. 샤를르 드 푸코 신부는 북부 아프리카 등에서 원주민의 마을에 들어가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를 본받아 이 세상 밑바닥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과 살면서 믿음을 증거하려는 수도회가 <예수의 작은 형제회>다.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푸코 신부님의 영성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 1년 동안 <예수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과 북아프리카 원주민 마을, 스페인 빈민가, 일본의 공장 지역에서 그 사회 가장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삶이 낯설거나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해서 좋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했다. 그의 글만큼이나 말에도 수식어가 거의 없었다. 그의 모든 것에 절제가 배어있었다.

이 후리후리한 젊은 신부 때문에 가슴 설렌 처자들 한두 명 아니었을 테고 신부하기 아까운 인물이라고 수군대는 소리 난곡 곳곳에 넘쳐났을 것이다. 할머니 신자들이 아들뻘 되는 신부님 손잡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집애들은 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고만 생각하세요.' 난곡의 청년들은 이 사제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성당 문 앞을 기웃거렸을 테고 이 더러운 놈의 세상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 가지라며 자포자기하던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가 내미는 손 어색하게 맞잡았을 것이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 흉내 제대로 내며 살아보겠다는 그의 야심 찬 도전은 불과 넉 달 보름 만에 끝이 났다. 그의 선택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청은 1986년 1월 4일 그를 주교로 승격시켜 서울 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본당 주임 신부는 임기가 5년이다. 적어도 5년은 이곳에서 여기 사람들과 같은 밥 먹고 같은 옷 입고 같은 냄새 풍기며 살겠다고 생각했던 강우일에게 주교 승격은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교황청 대사에게 나는 그런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못 된다고 사양했어요.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는 김수환 추기경께 말하라는 겁니다. 김 추기경님께 '저는 주교 재목이 못 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어이 강 신부, 저기 십자가 위에 예수님 보고 못하겠다고 그래'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죠."

강우일의 후임 신부도 1986년 2월에 부임했다가 6개월 만에 해외 유학이 결정돼 난곡을 떠났다. 난곡 사람들은 불과 1년 만에 두 명의 사제가 임기 중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들은 죽어서나 벗어날 수 있는 난곡을 저 사람들은 쉽게도 오고 쉽게도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물었더니, "그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네요."라고 역시 밋밋하게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2009년 그가 쓴 김수환 추기경 추도사의 일부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 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파워볼게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난곡은 그에게 오랫동안 마음의 빚이었다. 불과 5개월도 안 되는 본당 사제 생활이었지만 난곡동성당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는 수십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2
2012년 부친 강영욱의 장례 미사 때 그의 강론은 사뭇 감동적이다. 강우일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한다. 슬픔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슬픔을 넘어선 듯한 목소리다.
강영욱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공무원과 군인을 거쳐 연탄공장, 냉동 수산업 등 다양한 사업을 했는데 부침이 심했다. 한국에서 39년, 일본에서 32년, 미국에서 20년을 살았고 평생 32번 이사를 다녔다니 강영욱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었다.

부친의 사업이 부침이 있긴 했지만 강우일의 집안은 그 시대 평범한 일반인의 집안은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 강세현은 경남 합천의 대지주였고 외할아버지 오위영은 신탁은행장, 3선 의원을 지낸 정계의 거물이었다. 강우일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오위영은 장면 내각의 장관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모 오현주가 1959년도 미스코리아 진이었다. 이래저래 그의 집안은 유명세 꽤나 타는 집안이었다.

강우일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63년 강우일 집안은 일본으로 이민을 갔다. 그의 나이 18살 때였다. 아버지 냉동 수산업이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직격탄을 맞은 데다가 새로 들어선 군부 정권이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바람에 한국에서 도저히 살 형편이 안돼 일본으로 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일본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다가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수회가 설립한 일본 조치(上智) 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을 나온 김수환 추기경과는 동문이다. 그의 선택은 4대째 천주교 신앙을 지켜온 집안의 장자 다운 선택이기도 했다.



#3
그의 삶의 전반부는 드라마틱 한 출세 스토리지만 후반부는 고배의 연속이다. 30살에 신부가 되어서 41살에 주교가 되었다. 이문희 대주교가 37살, 정진석 추기경이 39살에 주교가 된 예가 있지만 어쨌든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대교구장에서 30년 만에 물러났을 때 가장 유력한 후임은 강우일이었다. 서울대교구에서 주교로 16년 일했고 김수환 추기경이 가장 신임하고 후원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청의 결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정진석 당시 청주 교구장이 후임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2001년 강우일이 서울대교구 2인자인 총대리로 임명되자 사람들은 차기 교구장 승계 작업이 시작됐다고 해석했다. 71세 고령으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정진석 추기경의 뒤를 잇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교황의 선택은 달랐다. 서울 대교구 총대리로 임명된 지 1년도 안 된 2002년 8월 강우일은 제주교구장으로 발령이 났다.

"놀라긴 놀랐죠. 실망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제주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안 했으니까요. 당시 정진석 교구장님과 생각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계속 일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서울대교구장 인사에서 거듭 물을 먹었으니 내색은 안 했지만 아팠을 것이다. 왜 내가 제주로 가야 되느냐고 묻고 싶었을 텐데 그는 순명했다. 그것으로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교황청에서 추기경 서임을 발표할 때마다 유력 후보로 그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그의 추기경 서임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지만 신임 추기경 명단에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의 성향이 비슷하게 보여 그런 가능성을 더욱 높게 본 것일 텐데 결과적으로 허망한 기대였다. 강우일의 자리처럼 보였던 서울대교구장과 추기경의 자리는 한때 서울 교구 사무처장으로 그의 밑에서 일하던 염수정이 차지했다.

#4
일찍 주교가 되었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감이 컸던 것은 아니다. 초대 가톨릭대 총장을 할 때 이름이 좀 알려졌을까. 정의구현사제단에 가입한 적도 없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도 드물었다.



"(제주 오기 전에는) 그런 사회적 발언 안 했습니다. 우선 제가 보좌 주교라 적극적으로 나설 처지가 아니었구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님들이 주장하는 기본 취지에는 동의했지만 독재 권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쪽 편도 그들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분들의 저항의 방법론이 제가 기쁘게 동참하는 것을 어렵게 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20년 넘게 지내면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오만가지 꼴을 다 봤고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그가 겪은 오만가지 꼴과 별의별 일에는 경찰과 안기부, 보안사로 상징되는 독재권력의 행태도 있었지만 정의와 양심의 깃발만 들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오만과 독선도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그것이 그를 꽤 힘들게 했던 모양이다.

그 시절 사회적 발언을 자제한 이유는 또 있었다.

"제가 평생 닮고자 했던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저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주님의 삶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것, 그것은 제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저 아니어도 말할 사람은 많았던 시절이기도 했구요."

제주도로 간 이후 그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은 자들의 주교로서 작은 자들의 입장에서 작은 자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자기가 돌봐야 할 양 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그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았다.

4대강 사업을 위해 전국의 산과 강을 파헤칠 때 '도둑질'이라고 거칠게 몰아세웠고 제주도에 제2공항을 지으려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편의를 위해 왜 우리가 그 땅에서 쫓겨나야 하느냐며 공항 건설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진보 정권이 나서 제주 강정 마을에 군사 기지를 지으려고 할 때는 왜 당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들의 삶이 위협받아야 되느냐고 따졌다.


사회적 발언은 내 몫도 아니고 내게 맞는 일도 아니라고 말하던 그가 제주도에 와서 왜 달라진 것일까. 무엇이 그의 굳게 닫힌 입을 열게 만들었을까.

"제주 4.3 사건입니다. 육지에 있을 때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싶었는데 여기 와서 공부를 해보니 너무 끔찍하더라고요.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비해 규모는 작을지 모르지만 국가에 의한 범죄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사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차분했고 목소리가 올라가지도 않았고 여전히 밋밋했다. 그래도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 짓는다고 할 때 4.3 당시 그 참혹한 일을 저지른 군대가, 군홧발 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다시 제주를 짓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때 나마저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역사 속에서 그때 교회는 무엇을 했느냐는 말을 들을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제주도에서 안식처를 구하는 예멘 난민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는 우리가 이거 밖에 안 되느냐고 통탄하며 난민들에게 잘 곳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2014년 헌법재판소가 8:1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을 때 불관용과 억압과 단죄와 처단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어둠의 시대라고 헌재 결정을 신랄히 비난했다. 두 사건 모두 다수 여론은 난민 추방과 헌재 결정이 잘 된 것이라는 쪽이었지만 그는 신앙인의 양심으로 외롭고 힘든 자들의 편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개발에 따른 이윤은 결국 가진 자들의 차지가 될 것인데 왜 우리가 가진 자들을 위해 피해를 감수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는 참아야 한다거나, 한 사람이 희생해서 아흔아홉 명이 행복하다면 한 명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필요한 곳에는 그의 이름을, 그의 지위가 필요한 곳에는 그의 지위를 빌려주었고 그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 어려운 사람들이 성당으로 찾아오기 전에 먼저 그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갔고 때로는 싸움의 현장에 나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제주에서 삶은 2천 년 전 나자렛 예수의 격렬한 삶을 연상시킨다. 4대강 사업을 도둑질이라고 대성일갈하는 것은 나의 아버지 집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며 성전의 좌판을 때려 엎던 모습 같고, 제2공항 건설은 무덤을 파는 짓이라는 경고는 예수가 채찍을 들어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당시 지식인들과 성직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외치던 예수의 모습은, 사람이 죽어 나가든 말든 나 몰라라 하면서 조용히 기도만 하는 사람들은 종교을 팔아먹고사는 직업인에 불과하다고 매섭게 몰아붙이는 그의 모습과 닮아있다.

"제가 명동성당 그 최루탄 연기 속 먼지 구덩이 속에서 20년 넘게 살았잖아요. 제주 발령 났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이제 아름다운 제주에 가서 편안하게 살라고 포상 휴가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아니더라고요. 여기는 더 심한 전쟁터더라고요. 서울에서는 생각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전쟁터였습니다. 요즘 들어서야 이래서 하느님이 나를 제주로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5
그의 말이 수시로 교회의 울타리를 넘고 제주도를 넘어 육지로 들려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서울 대교구장이 된 정진석, 염수정 두 추기경이 사회적 의제에 대한 발언을 꺼리거나 의례적인 수준의 발언에 그치면 그칠수록 그 역할은 강우일에게 떠맡겨졌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떠밀려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는 것은 아닌지 부담을 느끼는 기색도 없지 않았다.

"제 기질이 나서길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사하라 사막에서 숨어살 듯 살았던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 삶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분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몸이 아닌 입으로 많은 것을 떠드는 것은 제가 바라던 것이 아닌데 제주에 살고 주교회의 의장을 맡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FX시티

보수 정권 시절 그는 언론의 단골손님이었다. 제주라는 작은 섬에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제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언론이 그를 집중적으로 소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역시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주교 서품을 받았으면 자신의 교구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해 외쳐야 될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교구의 책임자인 그가 한국 천주교회 얼굴처럼 비쳤고, 7만 명의 신자를 가진 교구의 주교인 그가 5백만 명이 넘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자로 보였다. 주교회의 의장이라는 직책 때문이었을 텐데 때로는 그의 발언의 무게와 그의 자리의 크기가 균형이 맞지 않는 듯했다. 한국천주교회 최고 의결 기구인 주교회의의 의장은 무기명 비밀 투표, 이른바 교황 선거 방식으로 선출되어 주교단을 대표하지만 다른 주교들의 상급자는 아니고 한국 천주교회 대표자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의 목소리가 자주, 크게 울리면 울릴수록 그에 대한 불만과 비난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 주교 회의의 권위를 그가 독차지하는 것 아니냐, 그가 주교 회의의 이름을 사회적 발언에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를 종북 사제, 붉은 사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힘들 때 천주교회를 쳐다봤다. 거기에서 위안을 얻고 힘을 구하고 때로는 거기에서 잠시 쉬어 가기를 원했다. 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이 있던 천주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교회가 손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교회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랐다.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던 명동성당에서 농성자들이 쫓겨나기도 했고 그들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교회가 외면하는 일이 적잖이 벌어졌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시절, 정의와 불의가 너무도 분명하던 시절 천주교회가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껴안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선과 악이 다투는 시절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라는 서로 다른 가치가 부딪히는 상황이라는 것, 보수와 진보는 생각의 차이일 뿐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배제되고 어느 한 쪽이 정의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오로지 진보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교회 안에 존재한다.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확고하다.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 거짓과 악이 판칠 때 그때 침묵하는 사제는 양 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가 짖지 못하는 개와 같다는 7세기 교황의 말까지 인용하며 사제들의 사회적 발언과 비판 나아가 저항을 촉구한다.

"오늘 누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누가 잡혀간 사람들이며 누가 억압받고 있고 누가 앞을 못 보고 갇혀 있는지 관심이 없다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 사랑한다고 외쳐봐야 예수의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2014년 성탄 전야미사>

#6
2009년 겨울 김수환 추기경 장례식은 우리 시대 거인의 이름에 걸맞는 장엄한 의식이었다. 그 의식의 정점에 강우일의 추도사가 있었다. 그의 추도사는 알아듣기 쉬웠다.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써도 되나 싶은 단어가 곳곳에서 동원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

"추기경님을 흠모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이제 좀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불경스럽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말이지만 강우일은 자신 있게 이런 말을 썼다. 고인과의 절대적 신뢰와 애정이 없었다면 이런 표현 쓰지 못한다. 추도사는 마치 아들이 아버지 간병하듯 그가 김수환 추기경의 상태를 매일매일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소박한 민초들의 언어로 투병 중에 보인 김수환 추기경의 인간적 모습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배변만큼은 당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으나 그 마지막 자존심마저 포기해야 했다는 구절은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작은 인간이었음을 환기시켰고 온 국민은 다시 한번 깊이 김수환의 삶에 공감할 수 있었다.

추도사의 백미는 "많이 아껴주셨던 강우일이 인사 올립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다. 이 한 문장으로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각별한 관계였는지,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애정과 믿음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죽음이 갈라 놓은 이별 앞에서 헤어짐의 아픔을 이렇게 담담하게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두 분이 약주라도 한 잔 하시면 김 추기경께서 '어이 우일이, 아니면 야 강우일' 이렇게 부르기도 했던 거 아닌가요?"

그렇게 부르고 그렇게 불리는 관계였으니 강우일이 그 엄숙하고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된 자리에서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아니라고 답했다.

"저를 아들같이 대하신 것은 맞는데 교회에서는 품을 받으면 존칭을 씁니다. 그렇게 막 부르시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 추도사를 통해 온 국민이 애도하는 국민적 장례식의 실질적 맏상주가 다른 사람이 아닌 강우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말의 힘을 잘 아는 사람이다.

#7
그가 말의 힘을 아는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예는 교종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 수장을 교황이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교종이라는 단어를 쓴다. 교종이란 말은 예전에도 썼던 말이고 교회의 으뜸이란 뜻이니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 교회의 황제라는 뜻과 교회의 으뜸이라는 말은 어감부터 확연히 다르다. 강우일은 신임 주교들에게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교회가 오래되고 덩치가 커지면서 관행과 관례가 생겼다. 교회는 지혜도 생겼지만 고집도 세졌다. 초대교회에는 사제도 없고 주교도 없었다. 오직 형제와 벗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지금의 교회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모습을 교회의 본질인 양 오해하고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잘못된 겉칠을 벗겨내는 작업을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
<유경촌 이한택 주교 서임 축하 모임>

그가 말하는 교회의 <잘못된 겉칠>에는 전제적 군주 같은 교황의 존재도 포함되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만들어진 최초의 공동체 지도자가 지금의 교황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현 교회 제도가 교회의 본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이런 말을 할 때 그의 생각은 막 잡아 올린 생선의 날비늘처럼 싱싱하다.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칼 같다. 일흔다섯 노인네의 생각이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유연하고 급진적일 수 있을까.

천주교회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베일에 싸인 조직이다. 비밀이 많고 가리워진 게 많다. 그래서 음모론이 끊이질 않는다. 35년 동안 주교로 있으면서 베일 속의 권력 게임을 치르기도 하고 때로는 지켜봤을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런 것을 물어도 되나 싶어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는 어떤 질문도 거부하지 않았고 능구렁이처럼 답을 피하지도 않았다. 답이 길지 않고 상세하지 않은 것은 몸에 밴 절제 때문이거나 질문이 무뎠기 때문일 것이다.

2017년 정권 교체 이후 그의 사회적 발언은 줄어든 반면 깊이는 훨씬 깊어졌다. 그는 최근 심각하게 국가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국가를 위해 개인이 죽어야 하고 국가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그런 국가가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국가를 신화화하고 우상화하는 시도가 일본이나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고 우리나라도 그런 조짐이 없지 않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국가가 그리도 신성하고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 비판하고 의심하자고 말한다.

위대한 조국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강우일의 이런 생각은 위험천만하고 불온하게 보일 수 있다. 공동체의 근본 원리를 위협하고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그에게 한 인간의 생명과 권리는 그만큼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강우일은 역시 래디컬 하다.

#8
염수정 추기경 서임 축하식에서 강우일은 이렇게 말했다.

"되도록 지위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덜 만나고 이름 없고 기댈 데 없는 사람들 많이 만나시라.

2010년 인천 교구 신임 주교 축하식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주교가 되면 신부일 때와는 달리 몇 십 가지가 달라진다. 입는 옷부터 달라지고 비서가 생기고 기사도 붙는다. 그러다 보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당연히 자신은 예수 진영에 속해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마귀 진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천국에는 주교들이 백 년에 겨우 한 명만 들어간다는 농담이 있는 것이다. 25년 주교 생활한 사람의 덕담이다."

이 두 가지 사례를 들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염 추기경이라면 주교님 조언이 상급자의 훈계처럼 들렸을 거 같습니다."

"염 추기경님과는 서울대교구에서 같이 일하기도 해서 그렇게 서먹한 관계는 아닙니다. 그 정도 이야기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한 이야깁니다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제가 교만한 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제가 제일 고백하고 속죄하는 부분도 저의 오만함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을 하는데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급히 화제를 돌려 정년 이야기를 물었다. 올해 10월이면 만 75살, 교회법에 따르면 올해 정년이다. 빠르면 올 연말 늦어도 내년이면 은퇴를 한다. 은퇴 후의 계획을 물었더니 조용히 살고 싶단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들어주면서 조용히 제주에서 살고 싶단다. 그가 없는 제주를 벌써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은퇴 이후에도 제주에 근거지를 둘 것이란 말은 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겠다. 지금처럼 버스를 타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찾는 온유한 사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춘천지법, 경찰의 신상공개 결정 관련 피의자가 낸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 ‘인용’ / 성 착취물 유포·제작 범죄자 아닌 구매자 ‘최초’ / 법원 “곧바로 신상정보 공개돼야 할 공익상 긴급한 필요 없어” / 피의자 검찰 송치되며 “죄송하다. 억울한 부분도 있지만 지금 돌아보고 반성할 것”



텔레그램 ‘n번방’에서 아동·청소년 성(性) 착취물을 구매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30대 남성의 신상 공개가 법원에 의해 무산됐다.

춘천지방법원은 경찰의 신상 공개 결정을 두고 성 착취물 구매자 A(38·사진)씨가 낸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인용’ 결정을 내렸다고 3일 밝혔다. 이 때문에 A씨의 이름과 얼굴 등 신상은 예정대로 공개되지 못했다.

앞서 강원지방경찰청은 지난 1일 신상공개위원회를 열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위반 등으로 구속한 A(38)씨의 이름, 나이, 얼굴 등 신상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성 착취물 유포·제작자가 아닌 ‘구매자’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판부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현 단계에서 곧바로 신상 정보가 공개돼야 할 공익상의 긴급한 필요가 있다거나 공개될 신상 정보의 범위가 확정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신상 공개는 재판으로 범죄가 확정되기 전에 범죄자라고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효과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해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경찰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A씨는 ‘갓갓’(닉네임) 문형욱으로부터 ‘n번방’을 물려받은 ‘켈리’ 신모(32)씨로부터 성 착취물을 구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지난 2014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성인들을 대상으로 불법 촬영을 하고, 아동·청소년 8명을 상대로 성 착취물을 제작하거나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도 받는다. 다만 이는 A씨 단독범행으로, 불법촬영물과 성 착취물을 외부에 유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구매자 조사 과정에서 A씨의 PC를 압수·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런 여죄를 밝혀냈다.

경찰은 A씨가 성 착취물을 구매했을 뿐만 아니라, n번방이나 박사방 사건과 별개로 불법 촬영물과 성 착취물을 제작하는 등 범죄가 중대하다고 판단해 신상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범행 수법과 피해 정도, 국민의 알 권리, 신상 공개로 인한 피의자의 가족 등이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텔레그램 'n번방'에서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을 구매하는 등 혐의로 구속된 A(38)씨가 3일 검찰로 송치되기에 앞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피의자 A씨가 변호인을 통해 법원에 ‘신상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이날 법원이 인용하면서 신상은 공개되지 않았다.

만약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면 경찰은 A씨의 이름을 공개하고 이날 오후 4시30분쯤 춘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춘천지방검찰청으로 송치할 때 얼굴도 공개할 예정이었다.

이날 법원의 인용 결정은 오후 6시쯤에서야 나왔다. 법원 결정이 나오기 전 춘천경찰서 유치장을 나와 취재진 앞에 선 A씨는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피해자분들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또 그는 “억울한 부분도 있지만 혹시 제가 모르는 잘못한 게 있는지 지금 돌아보고 반성하고 있다. 죄송하다”고 거듭 밝혔다.

한편,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4·닉네임 박사)을 도와 성 착취물 제작·유포에 가담한 ‘부따’ 강훈(18)도 A씨와 같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지만, 당시 재판부는 “공공의 정보에 관한 이익이 강군의 사익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라며 기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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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서정환 기자] 주제 무리뉴 감독과 토트넘의 허니문이 끝난 것일까.

토트넘은 3일 오전(한국시간) 영국의 세필드에 위치한 브라몰 레인에서 열리는 2019-2020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32라운드 셰필드 유나이티드 원정서 무기력하게 1-3으로 패했다. 이날 패배로 토트넘은 승점 45(12승 9무 11패)에 머무르며 셰필드(승점 47, 12승 11무 9패)에게 7위 자리를 내줬다. 이대로면 유로파리그 진출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가뜩이나 성적도 좋지 않은 가운데 불화설도 터졌다. 영국매체 ‘더선’은 4일 “무리뉴는 더 이상 ‘스폐셜 원’이 아니다. 다니엘 레비 토트넘 회장과 불화설도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토트넘 부임 후 무리뉴는 20경기서 9승4무7패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경기당 득점은 1.65점이고 실점은 1.35로 득실이 0.3점뿐이다. 무리뉴의 승률은 45%에 불과하다.

‘더선’에 따르면 다니엘 레비 토트넘 회장은 당초 무리뉴보다 브렌든 로저스 감독의 부임을 원했다고 한다. 무리뉴는 첼시, 인터 밀란,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며 승승장구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부터 경력을 망치고 있다. 그가 더 이상 ‘스폐셜 원’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토트넘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무리뉴는 1500만 파운드(약 224억 원)의 연봉을 받는 거물급 감독이다. 하지만 최근의 부진으로 무리뉴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는 분위기다. 무리뉴 감독도 생존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 jasonseo34@osen.co.kr
[박다해의 젠더101]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까지 침해하는 제도
평등한 가족생활 명시한 헌법도 침해
부성주의는 '배제의 역사' 만들어
더 널리 알려져 부부가 논의하는 문화 생기길"
지난 1일 서울대에서 만난 양현아 교수. 양 교수는 자녀 성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고 부부가 동등하게 협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다해 기자

지난 1일 서울대에서 만난 양현아 교수. 양 교수는 자녀 성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고 부부가 동등하게 협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다해 기자


지난달 18일 자녀에게 엄마 성을 실제로 물려줬거나 물려주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보도된 뒤 해당 기사에 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관련기사 : 아이 없는데 혼인신고 때?...갈길 먼 ‘엄마 성 따르기’) 무조건 아버지 성을 따르는 걸 원칙으로 하지 않고 부부가 함께 협의해서 자녀의 성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해주신 분들도 많지만, “어머니 성도 결국 외할아버지 성이다” “여자도 그럼 군대가라”는 식의 댓글도 달렸습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나 괴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부부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데 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걸까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민법781조 1항에 명시된 ‘부성주의’(원칙적으로 자녀가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하는 것)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만나 함께 기사 댓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양 교수는 “부성주의가 오히려 전통을 불완전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며 “민법의 해당 조항에 대해 부부가 결혼 전에 논의해볼 수 있도록 더 널리 알려지고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머니’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이러한 제도 개선을 위해 “여성의 투쟁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처음 기사가 나가고 흥미로웠던 댓글 중 하나는 “어머니 성을 써봤자 그건 외할아버지 성을 쓰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어요. 어차피 남성의 성을 쓰는 걸 텐데 왜 이런 걸 요구하냐,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죠. 왜 이런 의견이 나오는 걸까요?

“우선 자녀에게 아버지의 성·본을 부여하는게 ‘원칙’이 되고 어머니의 성·본을 주는 건 ‘예외’가 된 상황이 왜 성평등하지 않은지 그 함의와 (이 제도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생각해봐야 해요. 사실 모계를 따를 수 있는 권리를 주는게 외할아버지의 성을 물려주자는 건 아닌데, 워낙 오랫동안 부계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죠.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게 2대 이상 이어져야 (어머니의 어머니 성을 따르는) 모계 성본주의가 가능해지는 거잖아요. 이런 얘기가 오히려 (그동안 공고했던) 부계 성본주의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겁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는 건 ‘역차별’이란 이야기도 있던데요.(웃음) 아버지의 성을 원칙적으로 물려주는 이 제도가 여성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하는) 부계 성본주의는 단순히 ‘상징적인 제도’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부터 침해하는 제도예요. 여성은 성관계를 가지면 언제나 임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부계 성본주의가 온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선, 모든 아이들이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아버지’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은 사실혼의 요건도 엄격하고 미혼·비혼모가 될 경우 차별도 심하죠. 여성이 아이를 낳으려면, 심지어 성관계를 가지려면 상대가 나와 아이를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물론 민법 781조 6항은 법원의 허가를 받아 자녀의 성·본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론 엄마가 재혼을 해서 아빠가 바뀌었을 때, 즉 계부의 성과 일치하게 만들기 위해서 바꿀 수 있는 선택지를 열어 준 거예요. 결국은 그 자체로 ‘부계 성본주의’를 한 번 더 확인하는, 사회적인 실천을 위한 제도인 셈이죠.”

―실제로 자녀의 성·본 변경 재판을 담당했던 변호사 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동안 가정법원의 성·본 변경 판례를 살펴보면, 친부가 동의했을 경우 그렇지 않을 때보다 법원이 허가해주는 비율이 높았다고요.

“이혼한 엄마가 자녀의 성본을 자신의 성본으로 바꾸고 싶어하면, 더 이상 친부와의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법원은 엄마에게 ‘당신은 다시는 재혼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라고 물어요.부계 성본주의를 원칙으로 삼다 보니, ‘엄마 성으로 바꿀 거면 앞으로 재혼도 하지 말라’는 얘기죠.‘현대판 수절’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남성은 이혼과 재혼을 할 때 새로 결혼할 여성과 자녀의 성이 달라서 고민을 하지 않잖아요. 이런 질문을 받지도 않고요.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여성은 성관계·동거·결혼·이혼·재혼 등에 따른 모든 선택권에 있어서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거죠.성적 자기결정권 측면에서 남성을 좇고 남성에 구속되도록 만든 제도예요. 기혼 여성 뿐만 아니라 미혼·비혼 여성 모두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헌법 36조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예요.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고요. 가족을 구성하고 싶은 욕구도 행복추구권에 포함될 수 있을텐데, 이를 실현할 때 여성과 남성이 불평등한 상황인거죠.”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면 법적·사회적 안정성이 흔들릴 거라고 우려하는 댓글도 많았어요. “전통을 벗어나는 일이다” “가까운 동성동본도 못 알아보게 된다” “갈 때까지 가는 나라가 되겠다”는 식이죠.

“호주제 폐지운동을 할 때도 호주제가 폐지되면 한국의 제사 제도나 조상을 기억하는 일이 다 무너질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웃음) 제사 관습과 호주제는 다른 것인데도요. (부계 성본주의가 끼치는 영향을) ‘계통’ 차원에서 살펴보죠. 한국에서 ‘씨’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의 상징이고 ‘가계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의 부모를 살펴보면 네 분의 조상이 있어요. 어머니의 부모님과 아버지의 부모님이요. 법학적으로 ‘모계’의 의미를 넓은 범위에서 보면, 사실 ‘아버지의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을 다 지칭하는 거거든요. 현재 부계 성본주의는 이 4명의 조상 중에 1명만 따르고 있고요. 따라서 이 부성주의는 철저한 배제의 역사예요. 여성은 늘 (세대와 세대를) 매개하고 사라지고, 또 매개하고 사라지는 거죠. 가족의 계통성이 우리 전통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후손의 입장에서도 오히려 부계 성본주의는 완전하지 않은 거예요. 모계 역시도 나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부계 성본주의가 전통을 불완전하게 계승하게 만든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사실 현대사회의 가족 개념과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조선, 고려 시대야 ‘누구의 몇대 손이냐’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던 사회였으니까 (부와 부를 잇는) 일직선으로 가족이 이어질 필요가 있었을 거라고 추정이 돼요. 하지만 지금은 가족의 개념 자체가 혈통이나 계통의 개념 보다는 관계, 친밀성, 보살핌 등을 중심으로 하잖아요. 이혼을 다투는 법정에서도 친권 행사 문제를 두고 ‘누가 더 잘 보살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따지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어요.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도 ‘예외’가 아닌 ‘원칙’이 된다면 오히려 조상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전통을 새롭게 쓰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더 다원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이어나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어머니가 나에게 물려준 많은 유산을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성·본이 왜 선택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죠? 부계 성본주의로 인해 사실 가족 안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엄마는 덜 중요한 사람으로, 아빠보다 열등한 사람으로 인지하게 하는 효과도 있어요. 성차별적인 관념을 암암리에 새기게 되는 셈이죠. 사실 부성주의를 법적으로 철폐한다고 해도 사회적으론 아버지 성을 따르는 비율이 높을 걸요?”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서요?

“모성을 부여하는 일이 가져오는 낙인효과가 존재하잖아요. 엄마 성을 쓰면 ‘아버지가 없나?’라는 점부터 생각하는 거죠. 만약 법적으로 엄마 성을 물려주는 권리가 남성과 동등하게 보장이 된다면, 법률혼에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로부터 모성을 부여하는 일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예외적이라고 웃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런 특징이 또 하나의 가족 형태로 굳어지는 거죠.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독특한 가족의 형태로 인정이 되면, 여성이 이혼 이후에 (아이 때문에) 재혼을 안 해도 되고요. 예외적으로 모성을 부여하는 걸 허용하는게 아니라 부부가 동등한 위치에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사실 자녀 성 뿐만 아니라 ‘세대주’나 ‘가구주’도 대부분 남성이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잖아요. 호주제가 폐지됐는데도 여전히 가족제도는 남성중심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저희도 남편이 세대주로 돼 있어서 선거 홍보물 등이 모두 남편 명의로 오죠. 공동명의로 등록이 돼 있는 가구도 다 남편 앞으로 서류가 오는 경우가 많죠. 공무원들에게 왜 ‘남성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감각이나 개념이 남아있는지 의아한 일이예요.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식민지 시대에 ‘호’ 개념이 들어왔는데, 지금 한국은 겉으로는 현대적이고 개방적이면서도 안에는 전통과 근대, 식민지성이 혼재돼 있는 거죠. 공무원들이 먼저 관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죠. 법원도 잘못된 편견을 없애는 노력을 해야 하고요. 한국은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을 1984년에 비준해 이행 의무가 있는데도 유독 ‘가족 성을 선택할 때 부부가 동일한 권리를 갖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16조 1항 지(g)호를 유보하고 있어요. 유엔이 거듭 권고하고 있는데도요. 스스로 가입한 협약에 왜 현행 법을 맞추지 않는지, 민법 781조 1항이 과연 헌법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해요.”

―자녀의 성을 결정하는 시점도 혼인신고가 아닌 출생신고 때로 늦춰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호주제 폐지 이후 민법 781조가 개정될 때 논의 내용을 보니 “출생 시에 자녀 성을 모성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면 ‘부부파탄’까지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더라고요.

“2003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시절에 법무부 산하 가족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호주제를 폐지하고 대안 호적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갔는데 사실 성본제도는 주요 안건은 아니었죠. 그래서 이 문제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못했어요. 사실 자녀의 성본 때문에 파탄나는 가족이 있을 정도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가족 안에서 협의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웃음) 결혼을 하고나서 첫 자녀를 가질 때쯤 돼야 부부가 혼인 생활의 양상을 더 잘 알게 되고, 또 결혼과 임신·출산 사이에 여러 일이 발생할 수도 있잖아요. 첫 자녀 출생신고 때 하는게 더 낫다는 의견이에요.”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무엇보다 예외적으로나마 부부가 협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민법 781조 1항에 대한 교육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모성을 부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작지만 열려있다는 걸 시민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결혼할 때 혼수도 장만하고 양가 인사도 다니고 집을 마련하는 것도 숙제지만, 결혼해서 ‘어떤 가족으로 살아갈까’를 논의하는 것도 그 때잖아요. 결혼을 앞둔 커플은 이 조항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봐요. 성본주의 뿐 아니라 ‘부부재산제’도요. 한국은 혼인 전에 이를 협의하지 않으면 ‘얄짤없이’ 별산제를 채택하고 있거든요. 둘이 충분히 결혼 전에 논의만 할 수 있다면 혼인신고 시에 자녀 성을 선택하도록 해도 큰 무리는 없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점보다 ‘원칙과 예외를 두지 않는 것’이니까요.”

―사실 이 기사가 나간 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여자도 그럼 군대가라”라는 댓글도 몇몇 있더라고요. (웃음)

“제가 군대 관련한 연구도 했는데요. 남성에게만 병역 의무를 규정한 병역법 3조 1항을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현행 제도가 합헌일 수 없다고 봐요. ‘남성만 군대를 가는 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거죠. 남녀 모두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참여하고 복무 기간을 줄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국방 문제는 재편돼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여성’이나 ‘성평등’ 관련 이슈라고 해서 다 한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사안은 아니죠. 농사짓는 분들에게 우리가 보건 문제를 물어보나요? 이런 댓글은 서로 다른 영역의 논의를 한데 섞어 논지를 흐려버리는 얘기죠. 지금의 불평등한 상황을 직시하고 수용해야죠.”

―얼마 전 여성가족부의 ‘가족다양성 인식조사’에서 국민의 73%가 “아이 성은 부모가 협의해야 한다”고 응답했어요. 관련해 청와대 국민청원도 시작됐고요. 앞으로 ‘부계 성본주의’를 바꾸기 위해 어떤 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관련 기사 : 국민 73% “아이 성 부모가 협의해야”…“부성주의 개정” 청원도 )

“한국만 이런 여론이 높은 건 아니예요. 2017년에 한국·일본·대만의 성본문제에 대한 세미나를 연 적이 있어요. 당시 대만에서도 자녀에게 엄마 성을 부여하는 걸 찬성하는 여론이 2002년과 2012년 10년 사이에 33.9%에서 70.5%로 2배 이상 늘었어요. 대만은 실제로 2005년 이후 자녀 성을 부모가 협의해서 결정하는 걸로 법을 개정했음에도 현실에선 90% 이상이 부계성본을 따르고 있거든요. 일본 대법원도 가족이 ‘하나의 성’을 좇아야 한다고 하지 그걸 남성이라고 명시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현실에선 부계 성을 따르는 경우가 대다수고요. 그럼에도 법적으로 ‘선택’이 가능하게 만들어놓은 건 진전이죠.

법도 바뀌고, 이 조항이 현실적으로도 실현이 되려면 무엇보다 ‘민법 781조 1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공론화돼야 해요. 실제로 ‘엄마 성 물려주기’를 실천한 사람이 어떤 불이익을 받는지, 이 조항이 나의 결혼과 이혼, 재혼의 자유를 어떻게 제한하는지, 엄마 성을 따른 아이들이 이것 때문에 학교에서 힘든 점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와야죠. 여성의 투쟁도 필요하고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한겨레>에서 여성가족부를 출입하며 젠더 분야를 취재하는 박다해 기자입니다. ‘젠더101’ 연재를 통해 조금 ‘쉬운’ 젠더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101’이란 숫자는 흔히 어떤 학문의 개론이나 입문 수업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젠더101’ 코너에서 우리의 일상이나 주변의 이야기를 전할 예정인데요. 다양한 사람,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성평등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왠지 ‘각 잡고’ 읽거나 공부해야할 것 같은 부담은 덜어내셔도 됩니다. 다뤘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언제든 제보 부탁드려요! doall@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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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HDC·애경·이상직 의원 연달아 만나
"주무 부처 역할·책임 회피 위한 꼼수" 비판도

지난 2월 10일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항공사 CEO 간담회. © News1 박지혜 기자


(서울=뉴스1) 전형민 기자 =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3일 항공업계 인수·합병(M&A) 관련 기업 CEO를 잇달아 만났다. 연초부터 코로나19 등 외부 변수로 항공업계가 고사 수준의 타격을 입으면서 M&A가 지지부진해지자 주무 부처가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항공업계에서는 김현미 장관과 CEO 면담을 두고 이미 시기가 늦어 안타깝다면서도 M&A가 성사 된다면 '결정적인 한 방'이 될 것으로 봤다. 일각에선 정부의 뒤늦은 개입에 대해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4일 국토부와 항공업계에 따르면 전날 김현미 장관은 정몽규 HDC현산 회장과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 이상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차례로 만나 진행중인 M&A 관련 면담을 나눴다. 김 장관은 기업별 M&A 진행 경과와 입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적극적인 노력을 당부했다.

HDC현산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협상에 있고, 애경그룹은 이스타항공을 인수 협상 중인 제주항공의 모기업이다. 이상직 의원은 이스타항공의 창업주다.

김 장관은 "각 당사자의 명확하고 수용 가능한 대안 제시를 통해 대승적 차원에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명확한 인수 의지를 보일 경우 국토부와 관계부처가 긴밀히 협의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최대한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국토부는 그동안 기재정부, 금융위원회, 산업은행 등 관계부처 및 정책금융기관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M&A를 지원해왔다. 그러나 연초부터 코로나19로 항공산업이 고사 상태를 맞으면서 M&A가 지연됐다.

최근 M&A 종결시한이 임박해서도 당사자 간 해법이 마련되지 못하면서 조종사와 승무원 등의 고용불안과 항공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선 항공사 인허가와 취소, 노선권 등을 담당하는 국토부가 M&A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다 지금에서야 중재에 나선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그동안 뒷짐만 지고 코로나19 핑계만 대다가 이제와서야 나서는 것은 '뭐 했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고 지적했다. 두 건의 M&A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주무 부처의 역할과 책임론이 대두될 것을 우려해 뒤늦게 '시늉'에 나섰다는 비판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방관하던 김 장관이 직접 중재에 나선 건 제주항공이 인수 포기로 가닥을 잡았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파워볼사이트

이어 "대한항공만 살리고 이번 기회에 항공사들이 자연적으로 정리되기를 바라는 대마불사 논리가 결국 지금의 사태를 빚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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